문재인 대통령과 아세안 각국 정상들이 지난해 11월 부산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부대행사로 열린 혁신성장 쇼케이스에서 현대자동차의 수소전기차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산업 혁신은 어느 나라에서나 경제 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키워드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 등에 따른 산업 지형의 변화로 기존 주력 산업의 성장성이 약화되면서 산업과 경제의 성장 역동성을 되찾기 위한 혁신성장 논의가 확대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이러한 환경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혁신성장을 소득주도 성장, 공정경제와 함께 경제 정책의 3대 축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럼 한국의 산업(경제) 혁신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2020 블룸버그 혁신지수’(2020 Bloomberg Innovation Index)에 따르면 한국은 독일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경제 혁신지수가 높은 국가로 평가되어 있다. 지난 5년간 연속으로 세계 1위의 자리를 차지하다 이번에 독일에 역전당했다. 한국의 혁신지수가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매우 반길 일이다. 그러나 혁신지수의 평가요소별 결과는 한국의 혁신 과제가 산적해 있음을 시사한다. 평가지표 7가지(연구개발 지출 규모, 특허 출원 수, 대학·대학원 총인원 및 이공계 학생 수, 제조업의 부가가치 비중, 생산성, 첨단기술 기업 비중, 연구개발 담당인력 비중) 중 한국이 높은 평가를 받은 부분은 연구개발 지출 규모와 제조업 비중, 첨단기술 기업 비중 등이었고 생산성, 특허 출원 활동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즉 혁신성장을 위한 인프라 부문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은 반면 혁신의 결과(생산성 등)에서는 매우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평가지표에서 혁신 인프라 또는 혁신성장을 위한 투자(투입) 부분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한국의 혁신지수가 높게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특징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혁신의 효율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혁신을 위한 투자는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결과는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혁신의 효율성이 낮다는 것은 혁신의 결과를 실체적으로 보여주는 기업들에 관련된 통계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미국의 보스턴 컨설팅 그룹이 발표하는
세계 50대 혁신기업 리스트에 한국 기업은 2개밖에 없다. 글로벌 중견기업을 의미하는
‘히든챔피언’ 기업 수에서도 한국은 독일,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프랑스, 영국 등에도 밀리고 있다. 서구의 기업들이 긴 축적의 역사를 바탕으로 높은 기술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비중이 낮은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으나, 단기간 급성장한 기업을 의미하는
유니콘 기업의 경우에도 한국 기업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것이 한국의 혁신 블랙박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
창업부터 막힌 혁신 프로세스 나라별로 투입 대비 산출이 천차만별이니 혁신(효율성)을 결정하는 요소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이것을 블랙박스라 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블랙박스에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책적 요소 등이 버무려져 있어 그것을 하나하나 해체하며 분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혁신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니 혁신 주체(특히 창업 기업가)의 행동을 보면서 혁신의 블랙박스 안을 살짝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혁신적 창업의 과정을 살펴보면 연구개발을 시작으로 상업화의 과정(수요조사, 자금조달, 시제품 완성 등)을 통해 대량 생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위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세계적인 수준이므로 시작점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다음 상업화 단계는 어떠한가? 상업화는 연구개발 성과를 바탕으로 상품을 개발하는 혁신적 창업 과정의 핵심 단계이다. 우리나라의 창업률(창업기업 수/총 활동기업 수, 연간 기준)은 세계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창업기업의 89%(2015년 기준)가 1인 기업이라는 점을 볼 때 우리나라 창업의 대부분은 아이디어를 통해 사업의 기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생존의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존형 창업이라고 볼 수 있다. 201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설문조사 결과 한국 창업기업의 21%만이 사업적 기회를 가지고 창업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63%는 고용시장에서 떠밀려 나와 창업을 한 경우였다. 반면, 혁신적이라고 평가되는 선진국의 경우 50% 이상이 사업적 기회를 가지고 창업한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의 혁신적 기업 창업률이 실질적으로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 왜 혁신적 창업률이 낮을까? 창업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는 창업 아이디어와 창업 의지, 자금의 확보 등이다. 우리나라 창업가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어디에 있을까? 중소벤처기업부의 2019년 창업기업 실태조사 중 ‘창업의 장애요인’ 항목을 보면 창업자금 마련의 어려움이 가장 높은 비중(72%)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창업 과정의 경제적 어려움과 실패 시 발생하는 막대한 피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창업을 주저하는 비중도 70%에 육박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국가 간 비교에서도 나타나는데, 영국 런던경영대학과 미국 뱁슨칼리지가 2016년 실시한 글로벌 기업가정신 조사(Global Entrepreneurship Monitor, GEM) 중 ‘실패에 대한 두려움’ 항목에서 한국은 65개국 중 55위를 차지했다. 창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삶의 불안정성에 대한 우려가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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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망은 사람을 뛰어놀게 한다 실패에 따른 두려움을 낮추고 혁신적 창업을 활성화하는 방안은 무엇일까? 우리는 넓은 트램펄린에서 신나게 뛰놀며 매우 창의적인 몸동작을 하는 아이들을 보곤 한다. 그들에게 창발적 자유를 준 것은 바로 추락에 따른 위험 제거일 것이다. 이러한 위험의 제거는 더 나아가 추락을 즐길 수 있게 만든다. 혁신적 창업 활동 역시 실패의 위험을 즐기고 실패를 성공의 디딤돌로 만들 수 있어야 활성화되고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실패를 하더라도 안정적으로 가정 및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되는 것이다. 2020 블룸버그 혁신지수로 다시 돌아가 보자. 혁신 인프라에 대한 투자 대비 성과가 높은 나라들, 즉 혁신의 효율성이 높은 나라들은 대부분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사회안전망 확충이 잘되어 있는 나라들이다. 프랑스, 벨기에, 핀란드 등은 2018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에서 공적 사회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육박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10% 수준으로 오이시디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사회안전망이 혁신에 긍정적 구실을 했다는 것은 최근 영국의 산업혁명에 대한 연구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17~18세기 영국의 구빈법은 규모나 제도의 안정성 측면에서 서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앞서 있었다. 영국의 구빈제도의 규모는 17세기 기준으로 연간 국민소득의 1% 수준이었고 18세기에는 2%까지 증가하여 당시 경쟁국이었던 프랑스(1780년대 기준, 영국의 7분의 1 수준)나 네덜란드(1820년대 기준, 2.5분의 1), 벨기에(1820년대 기준, 5분의 1)를 압도했다. 특히, 다른 나라들이 재원을 성직자나 귀족의 기부금 등 제도화되지 않은 자금에 의존한 반면 영국은 모든 자산, 특히 토지와 건물에서 발생하는 소득에 부과하는 세금의 형태로 재원을 마련하여 매우 안정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제도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체계적인 구빈제도가 토대가 되어 다른 서구 국가와 다르게 도전적 기업가 정신과 투자의식이 고양된 것이다. ■
위험의 공유는 경제 발전의 기본이다 우리는 효율과 평등, 성장과 분배가 서로 상충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혁신적 성장의 동력이 혁신에 성공한 자에게는 보상을, 실패한 자에게는 책임을 부여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경쟁적 시스템에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사회적 복지의 확대는, 경제적 측면의 효율성 희생이 불가피하지만 사회적(정치적) 안정을 위해 약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안전망의 확대를 단순히 정치적 분배의 측면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사회안전망의 확대는 경제주체들이 직면한 위험을 사회적으로 공유함으로써 그들이 직면한 삶의 불안정,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경제적 선택행위에 자유를 줌으로써 경제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발전의 핵심인 주식회사 제도가 기업가와 혁신가에 대한 위험공유 시스템이라는 사실이 경제 발전에서 위험 공유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우리는 위험에 대한 도전을 격려하며 성공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려 한다. 그런데 도전에 대한 실패는 왜 공유하려 하지 않는가?
이재우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산업경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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